중부경찰서 청문감사관실 경위정동조
조선시대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로는 정약용․맹사성․황희․이현보․이황․이원익․김장생․이항복․정홍순 등 219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청렴은 목민관(牧民官)의 본무요, 모든 선(善)의 근원이요, 덕(德)의 바탕이니 청렴(淸廉)하지 않고서는 능히 목민관이 될 수 없다. 욕망이 큰 자일수록 반드시 청렴해야 할 것이니,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까닭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부터 깊은 지혜를 가진 선비로서 청렴을 좌우명으로 삼고 탐욕을 경계하는 자를 청백리라 하였다.
황희 정승은 18년동안 영의정을 지내면서도 청빈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로도 첫손가락에 꼽히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거나, 높은 관직에 올라 권세를 잡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을 맑게 하여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다운 도리를 다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으며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 동안 유배 생활로 인하여 자식들에게 남길 변변한 유산이 없자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두글자를 남기니 하나는 勤(부지런할 근)이고 또 한 글자는 儉(검소할 검)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라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을 당부하였으며
정조 때 우의정을 지낸 정홍순(鄭弘淳)은 일찍이 10년 동안이나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나라 살림을 내 살림처럼 아낌으로써 명재정가로 이름을 빛냈다. 어느 날 파전(破錢) 한 푼을 때워 붙이기 위해 두 푼을 들였다. 누가, 한 푼을 위해 두 푼을 들이면 한 푼이 손해가 아니냐. 고 하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 개인은 한 푼이 손해지만 나라에는 한 푼이 이익되니 공익이 아닌가. 라며 나라의 재산을 내것처럼 아끼는 청렴을 유산으로 남긴다
조선시대에서는 정승이 소를 타고 다니고, 비가 새는 초옥에서 살았다 그것은 그때의 가치관으로서 마땅히 청렴한 행위지만,
현대에는 위의 3분들의 유산에서 보듯이,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다운 도리를 다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로 나라의 재산을 내것처럼 아끼는 청렴이야 말로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요구되는 위정자, 관리(공무원)들의 덕성이 아닐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