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다. 고향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 가셨단다. 몇 달 전 명절 때 만 해도 정정하셨던 분이라 순간 드는 생각이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닐까 했었는데 원인을 알고 보니 의외였다.
한식날 산에 벌초를 하러 가셨다가 말벌 집을 건드셨고 벌에게 쏘여 쇼크사 하셨다는 것이다. TV 뉴스에서나 잠깐 나오는 그런 사건 사고로 지인을 너무나 허망하게 보내고 나니 그 이후 소방관으로서 출동 하나하나가 생명의 무게만큼이나 크게 다가왔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1당백의 소방관이 되기 위한 수많은 교육훈련을 받았고 어느 샌가 말벌안전사고 출동을 나가 시민의 안전을 돌보게 되었다. 일을 하다가 벌에 쏘여보기도 하고 친구 아버지 일도 있고 해서, 봄·가을에 산에 갈일이 있으면 스프레이형 모기약을 항상 휴대하는 편이다.
말벌 잡는 스프레이가 따로 있다. 소방관들은 보통 그걸 쓰는데 일반 가정집에 있는 스프레이형 모기약 역시 효과가 있으니 특히 봄가을 산행 시에는 하나씩 챙겨 가시길 권유 드린다.
때는 6월 중순이었다. 아버지 묘소 벌초를 하러 형님들과 조카들이랑 해서 길을 나섰다. 산 중턱쯤에 다 달았을까 어디선가 익숙한 윙윙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했는데 조카들이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기 시작 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식은땀이 흐르고, 그놈들인가? 하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조카들의 얼굴이 스치며 병원응급실이 오버랩 되었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그놈들이 아니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카들에게 몸을 날렸다. 등에 맨 가방 지퍼가 찢어 질 정도로 가방을 벌려서 모기약을 꺼내 쉬지 않고 뿌려댔다.
이윽고 들리는 콜록 거리는 소리, “삼촌 그만 좀 뿌려”. 잠시 후 윙윙거리는 소리도 잦아 들었다. ‘이제 된 건가?’ 다행이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주변을 확인해 보니 길 잃은 말벌 몇 마리의 시체가 보였다. 순간 가슴을 쓸어내리고 위기탈출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와는 달리 형들은 참으로 태연해 보였다.
‘내동생이지만 참 희안한 녀석이다 산에 온다고 모기약까지 들고 오다니...’ 하는 표정으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벌초 내내 형들은 날보고 궁시렁 거렸지만, 나는 그런 형들을 향해 ‘다음부터는 모기약 2통을 챙겨 오겠노라’ 며 의기양양해 했다.
6월은 호국의 달이다. 500년 전 왜구의 침략을 미리알고 10만 양병 설을 주장하신 이이 선생의 ‘유비무환’ 정신은 결코 국가적 차원의 큰일에만 빗대어 쓰는 말이 아닐 것이다. 가족의 안전을 나에겐 일어나지 않는 남의 일이겠거니 하며 운에 맡기지 말고, 때로는 사소한 준비와 대비가 소중한 가족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음을 명심했으면 좋겠다.